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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15 Group U2
  2. 2019.01.12 Group NIRVANA
posted by OFOFF 2019. 2. 15. 19:22

U2


1. 개요


U2는 보노 휴슨, 디 에지, 레리 뮬렌 Jr, 애덤 클레이튼으로 구성된 아일랜드

출신의 락밴드이다.





1976년 9월 25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마운트 탬플릿 고등학교에서 지금의 멤버들은 

물론, 기타리스트 딕 에반스(Dik Evans, 1976–1978), 이반 맥코믹(Ivan McCormick, 1976-1976), 피티 마틴(Peter Martin, 1976-1976)과 함께 7인조 밴드로 결성되었다.
몇 주 후, 이반과 피티가 이탈 한 뒤에 밴드 이름을 피드백(Feedback)으로 결정했지만

1년 뒤인 1997년, 그들은 밴드 이름을 다시 하이프(The Hype)로 변경하고 그 다음해인 1978년에 또 다시 'U2'란 이름으로 재변경하여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CBS의 눈에 띄어 1979년에 데뷔 EP Three를 발매하여 아일랜드 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80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아일랜드(Island) 레코드와 계약하고 데뷔 앨범 Boy를 

발표했고, 다음 해에는 두 번째 앨범 October를 냈다. 이 시절의 대표곡으로 

'I Will Follow'가 있다.

초창기에는 로큰롤을 기반으로 한 직설적이고 둔탁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밴드였다. 이 시절 평론은 그럭저럭 좋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해 비운의 

밴드가 될 뻔했다. 

1집과 2집은 당시 유행하던 락의 느낌과 아일랜드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 그리고 

반항기 어린 가사들이 섞여 있으며 풋풋함이 잔뜩 묻어 있는 보이밴드의 느낌이 

다분하다.

2. 전환점


1983년 낸 앨범 War가 영국차트 1위에 올랐고, 미국 차트에서는 12위에 올랐다.

이후 투어에서 매진 공연을 잇따라 만들어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War 앨범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앨범으로 

반전주의의 메시지를 담은 'Sunday Bloody Sunday', New Year’s Day’, Seconds를 비롯한 여러 명곡들을 수록했다.




이후 U2에게는 중요한 인물인 브라이언 이노를 만나 작업한 앨범 'The Unforgettable Fire'로 미국에서 차트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이 앨범은 예전에는 다른 앨범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U2의 다른 명반들에 견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시원시원한 분위기가 특징인 밝은 포스트 펑크 넘버 'Pride (In the Name of Love)', U2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인 'The Unforgettable Fire' 등이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87년, 명반 대열에 합류한 앨범 Joshua Tree를 내놓았다. 전작들에 비해 더 잔잔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밴드로 떠오르게 된다. 앨범에 수록된 'With Or Without You'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로도 널리 불려지는 U2의 대표곡으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또다른 빌보드 넘버원 히트곡인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앨범의 포문을 여는 곡이자 U2 팬들에게는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등의 곡들도 수록되었으며 이 앨범을 통해 U2는 명실공히 80년대 최고의 록밴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어진 The Joshua Tree 투어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스타디움 공연에 나섰고, 밥 딜러과 같은 다른 뮤지션들과 같이 연주했다. 이 때 미국 투어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오늘 날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라이브 앨범-영화 Rattle And Hum(부릉부릉 덜컹덜컹)이다.


3. 슬럼프

그러나 이후 멤버 간 음악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 보노와 에지는 좀 더 세련된 팝을 원했던 반면 애덤은 본연의 둔탁한 하드 록과 포스트 펑크를 원한 것이다. 이들은 베를린에서 'One'을 녹음하며 갈등을 봉합하고 1991년 'Actung baby'를 발표한다.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 앨범에서는 얼터너티브 락과 일렉트로니카 ,인더스트리얼, 매드체스터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실험적인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또 이때부터 활발한 사회 활동도 시작했다. 앨범의 대표곡으로는 아름다운 가사와 잔잔한 멜로디로 U2 최대의 명곡으로 자주 꼽히는 'One', 특유의 강렬한 베이스와 기타 리듬비트가 인상적인 'Mysterious Way', U2의 얼터너티브 락을 대표하는 곡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등이 있다.


1993년 발표한 'Zooropa' 앨범은 평은 괜찮았지만,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적인 성공에도 실패하면서 U2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 앨범에 'Stay (Faraway, So close!)' 라는 명곡이 들어 있다.


4. Return


U2는 실험을 끝내고 2000년대에는 다시 본래의 록 사운드로 돌아갔다. 브라이언 이노가 다시 참여한 2000년 앨범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앨범은 U2 본연의 밝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록을 더 현대적으로 이끌어 낸 개성있는 사운드가 특징으로, 그래미상 주요 부문을 휩쓸었고, 22개국의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대표곡인 'Beautiful Day'도 크게 히트하며 각종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평단도 호평 일색으로 정상으로의 귀환을 축하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초창기 음악이 지금의 

음악 보다는 훨씬 더 좋았던 듯 하다. 


그래도 가장 인정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오랫동안 밴드를 잘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도에 청계천 상가에서 U2의 VHS 비디오 테이프를 사러 돌아다니던 생각이 지금도 문득 나곤 한다. 그 테이프가 바로 Rattle And Hum(부릉부릉 덜컹덜컹) 이다. 그 테이프를 친구와 보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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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NIRVANA  (0) 2019.01.12
posted by OFOFF 2019. 1. 12. 13:31


NIRVANA

1. 개요




너바나(산스크리트어: निर्वाण 니르바나, 영어: Nirvana)는 1987년에 워싱턴 주 애버든에서 보컬 겸 기타리스트 커트 코베인과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이 결성한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다.


밴드 이름 너바나는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를 말하는 불교 용어 열반(니르바나)의 영어식

표현이다.


2. 활동


7년이라는 활동 시간 동안 오로지 세 장의 정규 음반을 발표하는데 그쳤으나 너바나는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얼터너티브 밴드로 평가되고 있다. 코베인의 자살 뒤인 1994년 밴드는 해체되었지만, 그들의 음악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대의 로큰롤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980년 말 너바나는 자신들 스스로를 시에틀 그런지 씬에 귀속하였고, 1989년 독립 레코드 레이블 서브 팝을 통해 첫 정규 음반 《Bleach》을 발표한다. 이들은 종종 조용한 절과 시끄럽고 무게있는 코러스 사이의 동적인 대비에 기저를 깔아 사운드를 개발하였다. 메이저 레이블 DGC 레코드와 계약한 뒤 두 번째 정규 음반 《Nevermind》 (1991)에서 배출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로 예상못한 성공을 맛본다. 너바나의 갑작스런 성공은 얼터너티브 록을 널리 유행시키는 데 일조하였으며, 매체에서는 너바나를 X 세대의 "대표 밴드"라고 간주하였고 코베인에 대해서는 "세대의 대변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들의 세 번째 정규 음반 《In Utero》 (1993)은 거칠고, 덜 주류적인 사운드와 이들의 관객에게 보내는 도전이 담겨있었지만, 이 또한 전작과 같이 극찬을 받았다.


너바나의 활동은 1994년 코베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지만, 남은 멤버인 노보셀릭과 그롤, 그리고 코베인의 아내 코트니 러브의 관할 아래 그의 사후에도 갖가지 작품이 출시되었다. 너바나는 데뷔 이래 미국 한정으로 2,500만 장의 음반을 팔았고, 전 세계에서 7,500장의 음반을 팔아 역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 밴드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2]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앨범


  ★ BLEACH



이 앨범은 예상과는 다르게 차트상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이미 지역을 넘어서는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잠재력을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0년에는 그 전까지만해도 불안하기 짝이 없던 드럼 자리에 안정적인 파워 드럼 실력을 갖춘 데이브 그롤이 들어가게 되면서 너바나의 트리오 체제가 완성되었다.


  ★ NEVERMIND



너바나는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했고, Smells Like Teen Spirit을 비롯하여 In Bloom, Lithum과 같은 Nevermind 앨범의 주요 수록곡들을 만들어 냈다. 멤버들은 녹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녹음한 뒤에 프로듀서 부치 빅이 마스터 테입을 들려주자 너무 깔끔한 사운드에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하려고 했다가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고 귀찮아서 놔뒀다고 한다.[6] 한편 그러는 사이에 밴드는 각종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인지도를 쌓았다. 


마침내 9월 24일 Nevermind 앨범이 발매되었다. 게펜 레코드는 당초에 소닉 유스가 1990년에 발표한 앨범 Goo의 판매량 25만 장 정도가 팔리리라고 예측했다. 앨범은 처음에는 빌보드 앨범 차트 144위를 기록하면서 게펜의 예상대로 가는 듯 했지만, 처음 찍어낸 5만 장이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를 MTV에서 계속해서 방영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91년 말 앨범은 50만 장이 넘게 팔렸고, 92년 들어서는 무려 3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이는 시대를 바꾸었다. 1992년 1월 11일, Nevermind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 앨범을 밀어냈다는 말이 있지만 이미 Dangerous 앨범은 4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한 뒤 내려올 시기에 너바나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또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지만 1주 후 브룩스에게 빼앗긴다. 


또, 이 날 너바나는 SNL에 출연했는데, 노보셀릭과 그롤은 공연이 끝나고 입을 맞추었다. 이는 주류 문화를 비판하며 동성애를 지지함을 표시하는 행동이었다. 톱 오브 더 팝스에 나와서 대규모 깽판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당시 연주 및 보컬 모두 립싱크와 핸드싱크를 해달라는 방송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출연조건을 조정하다 결국 연주는 MR로 대체, 노래는 라이브로 부르는 것으로 절충하여 공연했다. 방송사 측에서는 "그 정도 쯤이야..."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나, 너바나는 BBC 엿이나 먹어라라고 방송시 누가 봐도 MR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말도 안 되는 포지션을 취하며 연주했다. 손바닥으로 기타연주하기, 요가(?) 드럼, 아크로바틱하게 휘두르는 베이스 등, 거기다 똘끼 폭발한 커트가 보컬톤을 극도로 졸리게 낮춰 부른 것도 이러한 의도의 연장선이었다. 심지어 가사까지 정신나간 개사[7]를 하면서 쇼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영국의 록 매거진 "가장 반항적인 락 퍼포먼스"에서 베스트 10에 선정하기도 했다. 당시의 커트 코베인 본인은 모리세이의 모창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이 퍼포먼스는 커트 코베인 마이크 먹는 영상으로 유명세를 더욱 탔다.


  ★ IN UTERO



1992년, 커트 코베인은 코트니 러브와 결혼했고, 8월에는 레딩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장식하면서 생애 최고의 공연을 펼쳤으며, 곧바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여러 상들을 거머쥐었다. 액슬 로즈와 싸우기도 했다 또 딸 프랜시스 빈 코베인도 태어났다. 1993년 2월에는 In Utero 앨범을 발매해 또다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원래 제목은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였고, 동명의 곡도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커트 코베인은 자기 유머를 팬들이 진심으로 여겨 자기가 자살하고 싶어하는 줄 알까봐 제목도 바꾸고 곡도 넣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듀서는 부치 빅에서 당시 여러 얼터너티브 밴드와의 작업으로 유명세를 타던 스티브 알비니로 교체되었고, 커트 코베인은 최대한 무겁고 더러운 사운드를 수차례 주문했다고 한다. 인디 시절의 펑크 음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결과물로 나온 사운드가 멤버들도 놀랄 정도로 지나치게 무겁고 더러웠고 결국 게펜 레코드는 몇몇 곡을 손보고 발매하였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Nevermind 처럼 레코드사의 손을 거치면 자신이 원한 방향과는 다른 앨범이 나올까봐 우려해서 레코드사의 결정을 계속 반대했고 결국 시중에 나온 앨범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인디 시절 발매한 Bleach에서도 돈이 없어서 프로듀서는 커녕 제대로된 엔지니어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녹음실 대여날짜는 다가왔기에 일단 녹음을 하고 멤버들끼리 어떻게든 해보려다가 대충 마무리해서 발매한 것이었기에 코베인은 앨범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너바나가 발매한 모든 앨범들은 커트 코베인이 마음에 들어한 사운드가 실리지 못한 것이다. 


In Utero 앨범이 발표된 뒤 너바나는 미국 투어도 다니고 MTV Unplugged에서 공연도 했지만, 코베인은 주류 록 밴드가 되어 버린 것에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었고, 다른 정신적 문제도 심해져서 헤로인에 깊숙히 빠져들었다. 거기에 팀 내부 불화까지 겹친다. 1994년 초, 너바나는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나 코베인은 3월 로마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이후 헤로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 시설에 들어갔으나 코베인은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서 도망친 후 시애틀로 돌아갔다.


4. 평가와 영향


록 음악을 넘어 대중음악사에 또 다른 한 획을 그은 밴드라고 할 수 있다. 일개 그룹의 범주를 넘어 9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강타했던 새로운 음악적 조류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밴드이며 1990년대 록의 흐름을 결정지은 전설적인 록밴드로 평가받는다. 얼터너티브 록이 90년대 초 음악시장을 장악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좀더 넓은 시각으로는 80년대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상업성이 극대화된 당시 록 음악의 틀을 깨고 언더그라운드 씬, 펑크와 같은 마이너 음악이 가진 가능성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3][4] 덕에 2000년대 초반까지 록 음악이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분화를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데뷔 이후 미국에서만 2500만 장의 음반판매고를 올렸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7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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